출산 후, 3주만 기다려주세요^^ 여름이를 낳고 집에서 산후조리를 할 예정이고 아이와 잘 적응하고, 잘 쉬기 위해서 부모님 외에 3주간은 손님을 모시지 않을 예정입니다.
최대한 빨리 블로그를 통해, 여름이의 얼굴을 선보일테니^^ 기대해주시고 혹시 꼬옥~ 직접 만나고 싶은 분들과 선물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ㅋㅋ 3주만 기다려리셔서 집으로 놀러오세요~ 참고로 출산예정일은 7월 25일(수)입니다. 긴 진통 끝에 7월 29일 일요일 밤 11시 20분에 태어났습니다.
신부와 신랑이 특별한 승리감으로 그들의 결혼일을 맞고 축하하는 것은 옳고 마땅한 일입니다. 모든 어려움, 장애, 방해, 의심, 그리고 불안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정직하게 맞닥뜨려 극복했을 때 ... 두 사람은 그들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승리를 일구어내었습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네”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자신들의 삶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했으며, 두 사람이 평생 동반자로 살면서 맞이해야 할 모든 불확실함과 주저함에 대하여 흔쾌하고 자신 있게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동으로 그들은 살아갈 새로운 땅을 정복했습니다. 인간이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고, 삶의 여정에서 조종간을 잡을 수 있는 그렇게 엄청난 자유와 힘을 부여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모든 결혼은 기뻐해야 할 순간입니다. 지상의 인간들은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된 사실에 자부심을 가질 만 합니다. 이 자부심의 일부가 신부와 신랑의 행복에 틀림없이 기여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너무 조급하게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에 관해 경건하게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승리를 축하하는 두 사람 자신의 인간적 의지라는 사실은 분명하며, 그 점이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이 선택했던 길은 처음부터 두 사람 자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행했으며, 행하고 있는 일은 일차적으로 어떤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세속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 자신, 그리고 두 사람 만이 누구도 여러분들로부터 뺏을 수 없는 책임을 지게 됩니다. 좀더 분명하게 말해서, 자신들이 가게 될 여정의 성공에 대한 모든 책임은 신부와 신랑에게 있으며, 그런 책임에 수반된 모든 행복도 그들의 것입니다. 만약 두 사람이 오늘 “그것이 우리의 결단, 우리의 사랑, 우리의 길입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없다면, 그들은 잘못된 경건 속에 피난처를 구하는 셈이 됩니다. ...
결혼은 서로에 대한 사랑 이상의 것입니다. 결혼은 더 높은 존엄과 힘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의 거룩한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 사랑할 때 여러분은 단지 세상 속에 있는 여러분 자신의 두 자아만 봅니다. 그러나 결혼 속에서 여러분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사슬의 고리입니다. ... 사랑할 때 여러분은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이라는 하늘만 봅니다. 그러나 결혼했을 때 여러분은 세상과 인류를 향한 책임 있는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여러분 자신의 개인적인 소유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지위이며 직분입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다스리겠다는 의지만이 아니라 왕관이 있어야 합니다. 결혼도 그와 같아서 두 사람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묶어놓는 일은 서로에 대한 사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따라서 사랑은 여러분으로부터 나오지만 결혼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이 인간 위 저 높은 곳에 계시듯이 결혼이 가지는 고결함, 권리, 그리고 약속은 사랑의 고결함, 권리, 그리고 약속 저 위에 있습니다. 결혼을 지탱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 순간부터 결혼이 여러분의 사랑을 지탱할 것입니다. ...
서로의 죄를 용서하는 가운데 더불어 사십시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인간 사이의 어떤 교제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결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마십시오.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지 마십시오.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마십시오. 서로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있는 그대로를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매일 서로를 용서하십시오.
졸업한 후 벌써 결혼한 사람들이 있고, 결혼을 앞둔 사람들도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소문 무성한 세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제자들 가운데 누구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제자들의 결혼에 무관심한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이미 참석하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 참석하지 못할 모든 결혼에 대하여 나는 진심으로 축하 하겠다.
여기에 그 일부를 번역하여 실은 것은 내가 존경하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감옥에 있으면서, 조카 레나테 슐라이허(Renate Schleicher)가 에버하트 베트게(Eberhard Bethge)와 결혼했을 때 편지로 써 준 결혼식 설교(주례사)이다. 1943년 5월에 써진 글이라서 지금 읽어보면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많은 전통적인 남녀관, 결혼관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례사는 내가 들었거나 읽었던 어떤 주례사보다 결혼이라는 것의 본질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일단 급한대로 몇 가지만 추려서 번역했다. 시간이 되면 내 생각을 정리해서 나름대로의 결혼식 주례사를 하나 쓸 생각이다. 그것이 결혼하는 모든 제자들에게 주는 내 마음이 되겠는데, 그때까지는 이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겠다.
(밑에 잔디가 쓴 글을 보니 이 주례사가 <<옥중서간>> 속에 번역되어 있는 모양이다. 꼭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인데, 이번 학기에 새로 개설한 "기독교 고전 강독"에 필독서로 포함시켰다. 너희들 모두 책임과 자유, 두가지 다 소중하게 여길줄 아는 사람을 만나기 바란다. 너희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면 그런 사람이 곁에 올 것이라고 믿는다.)
● 책설명
이 책은 저자가 온몸과 영혼의 무게로 자연농법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산속의 이웃들과 싸우고 화해하며 자연농법으로 흙에 바탕한 자급자족의 성공적인 경제를 이루며 산 스무 해의 온전한 기록이다. 여기에서 최성현은 일생을 걸고 일관되게 바래왔던 세계를, 그리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목숨 가진 것의 바탕인 공기와 물과 땅과 숲을 지키기 위한 자신의 고민과 실천, 거기서 얻는 보람과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 포기 풀을 존경하고, 벌레 한 마리에게서 배우는 삶을 통해 그는 삼라만상이 모두 신성한 존재이며 그러한 신성함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지 않는 한 우리의 미래는 없다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저자소개 : 최성현
강원도 출생. 동국대 대학원에서 노장철학을 전공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학종교 연구실에서 근무했다. 도시 생활을 접고 지금 사는 산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지난 1988년. 그는 산에서 하루 가운데 반은 농사를 짓고, 남은 반은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고, 번역을 한다. 산문집 〈바보 이반의 산이야기〉〈좁쌀 한 알〉 옮긴 책으로 〈짚 한 오라기의 혁명〉〈여기에 사는 즐거움〉〈잡초의 전략〉등 다수가 있다.
● 책내용 소개
쌀만으로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없다. 영혼의 배가 부르지 않는 한 쌀이 창고에 가득해도 나는 거지다. 씨앗을 모아 두고. 모내기를 하고, 물 관리를 하고, 잡초를 베고, 벼를 베고, 탈곡을 하고, 밥을 먹는 그 순간순간 맑게 깨어 있는 것이 거지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오늘 종일 벼를 베며 알았다. ―더 바랄 게 없는 산속의 삶(p.150)
우리 집에는 세가지 배추 밭이 있다. 하나는 사람, 하나는 배추흰나비 애벌레, 다른 하나는 토끼를 위한 밭이다. 땅을 갈지 않고 배추 심을 곳만 파고 배추 모를 심는 우리 배추 밭에는 배추만이 아니라 온갖 풀이 다 있다. 사람의 몫은 세 알 가운데 한 알이다. 대단한 양보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람만이 아니라 새와 벌레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사이좋게 사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중략) 지금 인류는 전 지구적으로 생태 농업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생명체들과 평화롭게 공생해 가는 방법을 조금씩 익혀 가고 있다. 벌레만 죽고 인간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는 그런 농업은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해 가고 있는 것이다.―머리맡에 콩 여섯알을 두고 잠들다(p.22)
텃밭에 나와 강물 소리를 들으며 무심히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강물에 모래가 씻기듯이 가슴속이 깨끗하게 비워진다. 감자를 심고 모내기를 한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비로소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 없어도 어쩔 수 없다. 내게는 달리 길이 없다. ―더 바랄 게 없는 산속의 삶(p.150)
벼 타작을 하던 날, 고맙게도 날씨가 좋았다. 그날 내가 썼던 탈곡 도구는 20년쯤 전에 주로 사용되던 발탈곡기였다. 이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기계이다. 불행하게도 다음 날은 날이 흐렸고, 뛰어다니며 비설거지를 마치고 하릴없이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자니 속이 탔다. 그렇게 되면 한 해 농사가 망가진다. 고맙게도 그날은 바람도 나았다. (중략) 돈으로 따지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도 나는 해마다 벼농사를 빼먹지 않을 것인데, 그 이상의 기쁨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언제고 왁자한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여름 내내 밤마다 반딧불 구경을 할 수 있는 것도 논농사 덕분이다. 싱싱하게 자라는 벼는 또 얼마나 내 눈길을 사로잡았나. 그것이 고개를 숙이며 누렇게 익어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또 얼마나 흐뭇했던가. 그런 것을 어떻게 돈을 주고 살 수 있으랴. 논에 미꾸라지를 사다 넣던 날 내 가슴은 또 얼마나 설레었던가. 그 뒤로 논을 볼 때마다 저기 그 미꾸라지들이 살고 있겠지 하는 생각에 나는 행복했다. 어떻게 이런 기쁨을 돈을 주고 살 수 있으랴!
올 한해도 우리는 당신 품 안에서 잘 살았습니다. 저는 올 한 해 진정한 뜻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제가 이미 부자인 것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남을 위하는 것이 저 자신을 위하는 길임을 분명히 알고 그렇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은, 만물 속에서 신을, 한울님을 뵙는 것이었습니다.
―가을에 하루는 잔치를 하자(p.36)
현금 수입을 위한 일과 아울러 가족이 먹을 농사를 병행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그런 삶은 먼저 현금 수입을 위한 일 그 자체에 여유를 줄 것이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에게나 세상에나 바람직한 일을 긴 안목에서 해나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다. ―반농반X(p.54)
불의 신이시여 비의 신에게 전해 주세요. 다음 주에는 벼 타작도 해야 하고, 호박도 더 이상 그냥 둘 수 없어요. 더 늙기 전에 썰어 널어 말려 들여야 해요. 제가 호박 좋아하는 거 잘 아시지요. 그러니 다음 주에는 참아 달라고 비의 신에게 전해 주세요. 잊으시면 안 돼요. ―알고 보면 사이좋은 물과 불(p.175)
식물이건 동물이건 우리는 모두 해의 종족이다. 우리는 모두 다시 낮이 길어지며 햇살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제 힘껏 갈무린 태양 에너지로 추위를 견디며 겨울을 나야 하는 것이다. 간혹 눈보라를 헤치고 손님이 오면 그 또한 손님이라는 이름의 햇살이다. 그는 아궁이 불 앞에 앉아 그가 해온 여행 이야기를 내게 들려 줄 것이다. 햇살은 그를 통해, 우리를 통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햇살 거두어들이기((p.106)
● 출판사 리뷰
“나의 종교는 한 포기 풀, 한 알의 쌀”
최성현이 사는 산 입구에는 ‘바보 이반 농장’이란 작은 문패가 걸려 있다. 그에게 톨스토이의 은 경전과 같은 책으로 가능하다면, 그는 그 나라의 주민이 되어 살고 싶어한다. 그런 그이가 자연농법을 실천하기 위해 산으로 거처까지 옮겼으니 그의 농사 규모는 크지 않다. 벌레와 풀을 형제처럼 여기는 자연농법의 방식으로 자급 정도의 논농사와 밭농사를 하고 있다. 아울러 꽤 큰 뽕나무밭을 가꾸고 있다. 거기서 나오는 오디로 발효음료를 만들어 시장에 내고 있다. 그는 화학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음은 물론 땅을 갈거나 벌거숭이로 만드는 일은 절대 없다. 그런 방침 덕분이리라. 그의 논에는 절로 생긴 미나리 밭이 있고, 거머리와 미꾸라지와 야생 달팽이와 소금쟁이 등 수많은 수생 동물이 산다. 밭에도 먹을 수 있는 풀이 많아 밥상에는 늘 야생초가 반이다.
이 책은 흙에 생활에 깊이 뿌리박은 저자 자신의 극히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그만큼 큰 감동과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바보 이반 농장 주인다운 농사법을 통해 문득 눈이 떠지는 자연의 섭리, 그 속에서 만나는 우주, 재미와 행복. 최성현이 부르는 삶에 대한 찬가는 독자로 하여금 진정한 행복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산에서 살다>에서 최성현은 말한다. “ 자연의 삶을 따르라! ”
다음은 산에서 최성현이 하는 일이다. 하루 가운데 반은 농사를 짓고, 남은 반은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고, 번역을 한다. 오래 걷거나 앉아 있는 일도 그가 즐기는 일 가운데 하나다. 예컨대 반농반X의 삶의 살고 있다.
왜 지금 최성현은 “자연의 삶을 따르라!”고 말하는가? 그는 시를 통해 고백한다. 죽을 때까지 자신이 먹을 것을 손수 농사 지어 먹으며 사는 것이 고도 수행이 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벌레나 풀과 싸우지 않는 농사. 농사가 곧 공부로 이어지는 농사. 그런 나날을 살고 싶어한다. 때로 길손이 들르면 따뜻한 밥 지어 대접하고 길손을 통해 하시는 한울님의 말씀을 듣고, 죽는 날까지 딱딱해지지 않도록 누구에게나 풀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까지 늘 고개 숙이며 살고 싶어한다. 가진 것은 도시만은 못해도 마음이 편하고, 육체노동이 있는 삶. 조용히 내면의 뜰에 빗자루질 하며 사는 삶. 한 포기의 풀을 존경하고, 벌레 한 마리부터도 배우는 삶. 홀로 농사를 지으면서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며, 자신을 깨우는 일에 힘쓰며 사는 산 생활을 통해 무엇이 우리의 삶에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사는 곳의 동식물의 종류가 다양해지는 것을 무엇보다 큰 보람으로 여기며, 자신의 삶이 그런 쪽으로 도움이 되고, 바뀌어 가기를 바란다. 그가 학수고대하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래 절 스님이 보았다는 장수하늘소를 친견할 수 있는 날이다. 그가 사는 곳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까막딱따구리나 솔부엉이와 같은 새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